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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임시정부
작성자 : [여행달인] 천년주목님
작성일 : 2020-01-16
조회수 : 75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운동 직후인 19194월 조국 광복을 목표로 중국 상하이에 조직된 임시 정부이다.

이번 가족과 함께한 상하이 여행에서 당시의 임시정부 건물을 둘러보고 우리 선인들의 애국심을

다시 한 번 존경하며 그 뜻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로 하였다.











임시정부는 이 기간 동안 7번이나 청사를 옮기면서도 내정·교통·군사·외교·교육·문화·재정·사법 등 모든 분야에 걸친 광복정책을 전개하며

뿌리를 내렸다. 이 시기는 3단계 임시정부 중에서 가장 업적이 많았던 반면 지도체제상에도 시련과 역경이 겹쳤다.

쑨원의 심복인 두웨성의 주선으로 상하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 22호에 청사를 정한 뒤 1919411일 임시정부를 선포하고 나서

우선 내정과 교통면에서 광복정책을 펴나갔다.

특히 1919~22년 전후까지 국내외를 연결하는 비밀조직으로 교통국과 연통제의 상설기구를 설치했다.

교통국은 교통부 소관의 통신기관으로 정보의 수집·검토·교환·연락 등 통신 업무에 치중하는 한편 비밀독립운동 자금의 수집업무도 겸했다.

교통국은 1919512일 국무위원 조완구의 시정방침 연설에서 처음 발표된 이래 같은 해 5월 국내로 진입하는 요로인

평안북도 신의주 건너편 동삼성의 안동현 단동시에 교통부 안동지부를 설치했다.

위치는 안동현 단동시 옛 흥륭가의 이륭양행 2층이었다. 이곳은 일본 영사관의 경찰권이 미치지 못했으므로

교통부 안동 지부는 임시정부 초기부터 국내외 정보를 수집·검토하여 통신하고 교환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연락처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다.

연통제는 국내의 9개도, 1, 45개 군에 조직이 이루어져 독립활동을 전개했으며, 만주에도 3개 총판부가 설치되어 국내외와 연락할 수 있었다.

연통제의 업무는 법령 및 공문의 전포, 군인·군속의 징모, 군수품의 조사·수령 애국성금의 갹출운동, 통신연락·정보수집 등 다양했다.

외교면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고, 중국·미국·영국·소련·프랑스·폴란드·몽골 등과 국교를 수립하고,

임시정부를 승인받기 위해 노력했으며, 파리 강화회의 및 국제연맹, 유럽과 세계 열국을 상대로 한

국제적 독립호소가 외교활동의 중심을 이루었다.

 3·1운동 이후 표방된 외교자주주의는 임시정부의 결의안이나 장정 등에서도 피력되어 각종 국제회의에 대표단을 구성하여 보내는 등

다각적인 외교활동을 벌였다. 특히 큰 성과를 거둔 것은 제2차 인터내셔널 회의인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석 활동한 것으로

이관용·조소앙이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군사 면에서는 처음부터 무장독립전쟁론을 광복정책으로 채택했다.

상하이에 신흥무관학교의 인재 육성정신을 살린 육군 무관학교를 설치하여 청년장교를 100여명 배출하고

동삼성 지역에 파견, 일제 군경과 대결하게 했다.

그리고 여러 지역에서 조직된 무장 독립군을 임시정부 직할부대로 편입하여 활용하고자

김좌진 김동삼 등 장군들을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임명하기도 했으며,

육군주만참으부서로 군정서 등을 직할부대로 편입했다.

특히 군무부의지부를 허얼빈이나 하바롭스키에 설치운영하기도 했다. 

 임시정부는 1932년 1월8일 김구가 직접 조직하고 주도해온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에 의한 도쿄에서의

일왕폭살의거가 미수로 끝나자, 429일 윤봉길로 하여금 상하이의 홍구 공원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축하와

1·28상해사변전승축하식장에서 투탄의거를 일으키게 했다.

이에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요시노리 등 20여 명이 살상되자 극악해진 일제의 보복을 피하여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제2기인 이동시대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대한민국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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